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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하의비극" 재구성과 한국의 "도하의 기적"

by 차삐라 201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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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10월28일은 한국 축구 역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한 페이지다. 지금으로부터 20년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5차전 결과에 따른 이른바 "도하의 기적(한국)" "도하의 비극(일본)"이 그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도하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흥미로운 기사가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도하의 기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지 혹은 잊어버렸는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 도하의 비극 재구성. 서막

 최종예선을 앞두고 도하에 모인 6개 국가들의 전력은 이라크와 한국이 가장 앞서고, 북한이 최하위, 일본이 그 위라는 평가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92년 다이너스티컵과 아시안컵(히로시마 개최)을 우승했고, 93년 4월의 1차예선에서 베스트 멤버들의 부상도 없었다. 또한 같은해에 야심차게 준비한 J리그도 출범하면서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믿는 분위기였다.
  최종예선 한달전 일본은 스페인 전지 훈련으로 팀 만들기에 주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베스트 멤버 중 하나인 왼쪽 수비수 츠나미사토시(都並敏史)가 5월 J리그 경기 도중 왼쪽 발목 골절 부상을 당했다. 완전히 낫지않은 상태로 J리그 경기를 거듭하면서 부상을 완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이었던 한스오프트 감독은 그를 스페인 전지훈련뿐만 아니라 최종예선 멤버로까지 뽑았을 정도로 깊은 신뢰가 있었다. DF츠나미사토시 - MF라모스루이(ラモス瑠偉) - FW미우라카즈요시(三浦知良)로 이어지는 왼쪽 라인은 일본의 주요 공격루트였다. 게다가 이 세명은 당시 J리그 최고팀인 베르디카와사키에서도 한솥밥을 먹었다. 결론적으로 츠나미는 최종예선이 끝나는 날까지 주사를 맞으면서까지 버텼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지켜봐야했다.
 또한 팀의 주축인 라모스는 한달을 남겨둔 상황에서 실전과 같은 경기를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토했고, 왼쪽 수비수 문제와 더불어 라모스의 불만이라는 스페인에서의 보이지 않는 균열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10일 앞두고 토쿄에서 있었던 아시아-아프리카 선수권에서 아프리카 우승팀인 코트디부아르와 대결에서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그러나 연장전끝에 이겼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코트디부아르는 늦게 일본에왔고 거기에 베스트 멤버도 아니었다. 일본이 원했던 왼쪽 수비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최종 예선 격전지인 도하로 향했다.

 

■ 2차전까지 절망적이었던 일본
 최종예선 두경기는 일본에게는 실망을 넘어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첫경기 상대였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일년전 아시안컵 결승에서 만나 이겼던 팀이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때 팀이 아니었다. 당시 결승골 주인공인 타카기타쿠야(高木琢也)를 봉쇄하고, 라모스와 미우라의 연계도 끊는등 일본의 공격을 무력화 시켰다. 당시 주장이었던 하시라타니테츠지(柱谷哲司)는 대회 종료후 한 방송에서 '상대가 자신들 수비의 약점, 공격의 강점을 철저히 연구했고, 이기기 힘들것 같다는 걸 느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일본의 첫경기는  0-0으로 그렇게 끝이났다.
 두번째 경기였던 이란은 주축 선수 일부가 빠져 일본이 생각했던 1승 제물이었다. 그러나 이란은 첫경기를 한국에게 패하면서 다른 팀으로 변해 일본과 맞섰다. 이란 역시 일본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왼쪽 수비수인 미우라야스토시(三浦泰年)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이란은 첫골 역시 왼쪽 프리킥에서 나왔다. 일본은 승리를 위해 미우라야스토시를 공격적으로 나서게 했고, 이란은 이를 노렸던 것이다. 또한 이란에게 피지컬면에서도 밀리면서 패했다.

 

■ 오프트 감독이 선수들에게 쓴 글자
 벼랑끝에 몰린 일본은 본선 진출을 위해서는 남은 세경기를 모두 이기는 것 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대표팀 내에서 정보 담당을 하던 야마모토마사쿠니(山本昌邦)는 이란전 패배 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이제 월드컵에 갈수 있다는 느낌이었고, 매우 주목받았다. 일본대표도 처음 전세기를 사용하고, 요리사를 대동해, 그런 하나 하나가 좋았던 반면, 주목도가 오른 것은 선수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되어있었다. 그럴때 갑자기 2시합에서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당연히 초조했다. 이제 꿈은 사라져버렸다는 분위기로 식당은 장례식같았다"
 오프트는 그런 선수들에게 하얀 종이에 "3wins"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3번 이기면 월드컵에 나갈수 있다. 왜 너희들은 그렇게 침울해 하고 있는가"라며 말했다. 자신감을 잃은 선수들에게 그 글자는 순간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이후 3명의 선수가 바뀌면서 기존 감독이 구사하던 걸 포기하면서 북한전에 나섰다. 이때 공격은 3톱 형태로 감독이 이란전 패배후 3톱은 짧은 시간에만 가능하다는 말을 뒤집고 경기에 나섰다. 벼랑끝에 몰린 일본은 북한을 이기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갔고, 오프트는 또 다시 2wins라는 글자를 선수들에게 보여줬다.

 

■ 운명의 한국전과 키타자와
 일본 축구가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려 할 쯤, 언제나 국제대회에서 일본의 발목을 잡은 것이 한국이었다. 월드컵, 올림픽 등 일본에게 한국은 커다란 벽이었고, 넘기 힘든 상대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을 1-0으로 이긴 일본의 승리에는 한 선수의 활약이 있었다.
 키타자와츠요시(北澤豪)는 이전부터 대표팀 주전이었다. 그러나 1차예선을 앞둔 오키나와 합숙에서 왼발을 다쳐 1차예선을 참가하지 못했고, 주전자리도 빼앗기고 말았다. 재활을 통해 스페인 전지훈련에 참가했지만, 오프트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소집된 27명중 27번째 선수다. 그걸 알고 행동하도록"
 일본이 북한에게 승리할 때까지 키타자와는 벤치를 지켜야만 했다. 늘 기회가 올거라 생각하던 그에게 때가 찾아왔다. 북한과의 경기에서 경고누적으로 뛰지 못하는 모리야스하지메(森保一)를 대신해 선발로 나섰다. 이미 북한전 끝날 쯤 교체로 들어갈때 그는 다음 경기를 위한 적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전에 나선 그는 풍부한 활동량을 자랑하면서 한국 진영을 휘저었고, 그의 활약으로 한국마저 이기면서 조1위가 되었다. 이때 오프트는 90min을 다시 한번 썼다.

 

[이 헤딩으로 도하의 비극과 도하의 기적으로 갈렸다.]

 

■ 최종 5차전. 일본-이라크
 여러모로 일본에게 유리한 상황이 됐다. '이제는 월드컵'이라는 환호를 먼저 떠올리던 일본에게 도하의 비극은 시작됐다. 마지막 5차전은 한국과 북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일본과 이란의 경기는 동시에 진행됐다. 당시에는 동시간에 시작한다는 규정이 없어 칼라파스타디움에서 차례대로 할 예정이었지만, 북한을 제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막판 순위가 바뀔 수 있었기에 각자 다른 경기장에서 하기로 정해졌다.

 

■ 도하의 비극을 부른 불안 요소. (1) 교체
 이라크는 오프트 감독도 가장 강한 상대로 지목할 만큼 강팀이엇다. 이라크전을 앞둔 일본의 멤버 구성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모리야스가 돌아오고 라모스를 중심으로 하는 베스트 멤버로 나섰다. 승부가 결정되는 불안한 경기일수록 본래 멤버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전반 5분에 미우라가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가면서 이라크의 반격도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그러면서 일본에게 조금씩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다.
 후반 이라크의 공격은 점점 강화됐고 후반 9분에 동점골을 넣었다. 이대로 무승부가 되면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못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승리가 필요했다. 후반 24분 이라크 선수가 쓰러져 누워있는 상황에 주춤하던 틈을 타 라모스가 나카야마마사시(中山雅史)에게 연결했고, 골로 이어져 다시 앞서게 된다.
 이라크의 볼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일본은 이라크의 공격을 막는데 주력할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체력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극을 부른 불안요소가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시 교체수는 필드플레이어가 2명이었다. 후반 14분 한차례 후쿠다마사히로(福田正博)로 바꾼 일본은 이 난관을 극복할 한 선수를 찾고 있었다. 추가골이 나온 후 라모스가 오프트 감독에게 말했다. "키타자와를 넣어줘". 활동량이 풍부한 키타자와의 움직임을 통해 이라크의 공격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키타자와는 이미 한국전에서 능력을 보여줬기에 충분히 통할 교체카드라고 라모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프트는 그렇지 않았다. 오프트는 후반 36분  나카야마를 빼고 타케다노부히로(武田修宏)를 넣었다. 당시 키타자와는 틀림없이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라모스도 그렇게 말햇고, 축구흐름을 봐도 자기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교체는 지금도 여전히 자주 언급되고 의문을 가질만큼 결과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대회가 끝나고 오프트감독은 한 방송에서 "선수는 필드위에서 자신이 생각한걸 말한다. 그러나 누구를 빼고 누굴 넣을지, 선수 교체는 내가 책임을 질 일이다."라고 말했다.

 

■ 도하의 비극을 부른 불안 요소. (2) 경험
 일본이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을 밟아본 건 1998년 프랑스월드컵이었다. 그 전까지 일본은 한국과 서아시아 국가에게 막혀 번번히 실패했다. 일본은 가장 중요한 때에 또 하나의 불안 요소를 들어냈다. 그것이 경험이었다.
 하프타임 때 라커룸에서 들어선 오프트는 선수들에게 오프트사커의 기본에 대해 지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앞서고 있는데다 이라크 공격을 막기위해 많이 뛰다보니 선수들은 각자 마음대로 말하는 흥분상태가 됐다. 그러자 오프트는 3번이나 셧업을 외치고 말았다. 가장 냉정해야할 감독이 평정심을 잃은 증거이기도 했다.
 방송 인터뷰에서 그때 상황에 대해 "선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냉정하게 경기를 돌아볼수 있었는데, 이날은 그게 안됐다. 기묘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침착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10분간 모두를 앉히고 '이제 45분이다.'라며 선수를 내보냈다."  또한 동점골을 실점하기 전 공을 돌리거나 골킥을 늦게 하는 등의 인지가 있었다면 달라졌을 수 있었다.

 월드컵 본선에 나가 본적이 없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지를 몸과 마음으로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경험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 쓰라린 경험이 미래를 만들었다.
 이라크 자파르 옴란 살만의 헤딩으로 골이 들어가자, 초조해 하며 담배를 물고 있던 오프트 감독은 길게 한번 빨고 꺼야했고, 추가골을 넣었던 나카야마는 들어누웠다. 경기가 종료되고 일본은 망연자실한채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걸 바라봐야했다. 그리고 이라크와의 경기를 도하의 비극이라 부르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그때 그일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고 말한다. 풍부한 선수층과 수준, 그런 선수를 키울수 있는 시스템의 결여가 일본 축구계가 안고있는 과제라는 걸 깨닫게 해 준 경기라고 돌아봤다.
 이후 일본 축구는 도하의 비극을 계기로 변하게 된다. 함께 했던 선수들과 스태프들은 그때의 경험을 다른 축구인들에게 전했고, 그를 바탕으로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안컵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도하의 비극이 없었다면 현재의 일본 축구도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 도하의 기적을 기억하자.
 한국 역시 그때 도하의 기적이 없었다면 월드컵 본선 7회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절망 속에서 살아났던 그 순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재 대표팀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가까스로 본선진출에 성공했지만 이후 치룬 평가전을 통해서 불안감을 드러냈고 자리를 잡지 못하는 상황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필요한 것이 과거의 경험이 아닐까. 도하의 기적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이라는 가장 동경하는 무대에 서기까지 선배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이갸기를 후배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
 도하의 기적으로부터 20주년인 어제. 도하의 기적에 대한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접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잘 알고 있기에 식상한 소재라면 "도하의 기적"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는 더이상 사용치 말아야 할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고 미래를 내다볼수 있는 어제였지만 허무하게 지나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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